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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농지개혁과 개도국에 주는 시사점

Ⅲ. 농지개혁의 성과

특정 정책 및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제1차 및 제2차 농지개혁 단 행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에서의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 다. “농지개혁은 매우 한정된 ‘역사적 의의’가 인정될 뿐만 아니라 농민의 빈곤과 농업생 산의 정체성을 그대로 온존시키는 것이 되고 말았다”(유인호[1975]; p.174)라는 평가가 대 표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비판적인 시각의 이면에는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의 토지개혁 보다 못하였다는 생각이 암묵 중에 전제되었기 때문이라고 김성호는 지적하였다(김성호 외[1989]).

한국의 농지개혁에 대한 이념적 평가는 1980년대 이후 농지개혁에 대한 실증연구가 이

루어지면서 종식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을 중심으로 농지개혁 연구가 실증자료를 근 거로 작성되면서 농지개혁의 평가는 이념 논쟁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더욱이 농지개혁의 성과는 특정 영역에 제한되기보다는 경제,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 타났다. 그러므로 농지개혁의 성과는 경제적 측면 외에 사회적 측면에서도 이루어질 때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하에서는 농지개혁 관련 성과 평가를 경제적 측면에서는 농업생산, 소득 재분배, 산업자본 형성 및 인적자본 형성의 관점에서 살펴보았고, 사회적 측면에서는 지주계급의 몰락과 농민 생활수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 경제적 측면 (1) 농산물 생산11)

농지개혁은 농업생산에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동시에 미친다. 농지개혁의 긍정적 효과가 부정적 효과를 능가하는 경우 농업생산은 증가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 농 업생산은 감소할 수 있다. 그렇지만 농지개혁 그 자체만으로는 농업생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사전적으로 알 수 없다. 농지개혁이 농업 생산에 미친 효과를 살펴보기 위해 농지 개혁 이전과 이후의 농업생산 증가율 추세를 비교할 수 있다. 문팔용 외(1981)는 농지개 혁 이전과 이후의 농업생산 및 미곡생산 증가율을 비교․분석한 결과 농지개혁으로 인한 생산 증가효과는 미미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이 증가하지 못한 가장 중요 한 원인을 자영농의 영세성에서 찾았다(문팔용 외[1981]). 1930년대 지주들은 농지에 대 한 일정한 노동 및 자본 투입과 더불어 주요 농업재료의 조달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농지 개혁으로 새롭게 탄생한 영세지주는 농업 투자를 감당할 여력을 전혀 지니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농가 부채의 규모와 구성, 농가 수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박명호 외 [2013b]).

영세지주가 농업 투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 농지개혁을 통해 일정한 수익을 확보한 정부가 농업 투자를 증가시킬 수 있다. 실제로 1950년대 한국정부는 농지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이익금의 일부를 농업생산 기반사업에 투자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증진에 일부 기여 한 것으로 나타났다(김성호 외[1989]).

위의 내용을 종합해 농지개혁이 한국의 농업생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규모의 경제로 인한 농업생산의 손실은 미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Pak[1966]). 반 면,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전환된 영세지주는 투자 여력 부족으로 농업생산 측면에서는 마이너스 효과를 초래하였다. 그렇지만 농지개혁 결과 농업생산이 다소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 확대에서 기인한다(김성호 외[1989]). 그러나 1956년

11) 한국의 농지개혁 및 농업생산과 관련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박명호(2013b)를 참조.

부터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국내 식량 공급량의 14%에 이르는 규모로 들어오면서 곡가 폭 락으로 농민의 생산의욕이 저하되었고, 그 결과 농업생산이 마이너스 증가율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한국의 농지개혁 및 농업생산과 관련된 박명호(2013b)의 실증분석에서 지적하였 듯이 한국의 미곡생산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농지면적으로 나타났다. 1950년대 이후 일부 영세지주들이 더 이상 자작 농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농지를 매각하면서 소 작률은 다시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런 영세지주의 농지이탈은 간척사업과 맞물리면서 농 민 1인당 농지면적을 증가시켰고, 이런 현실이 반영되면서 농업생산은 점진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박명호[2013b]).12)

(2) 소득 재분배

한국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한 염원은 매우 강렬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한국의 독립정부 가 들어선 이후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경자유전의 원칙을 선거공약으로 하는 정당 강령을 채택하였고, 이는 당시 헌법에도 명시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지주는 과거에 일본인에게 협력했다는 오점 때문에 그 지위가 매우 약하였다. 그 결과 지주계급과 이를 대표하는 정 치집단인 한민당의 정치인들은 수차례에 걸쳐 농지개혁법의 입법을 막으려 했지만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김성호 외[1989]).

그러므로 한국정부의 농지개혁은 미군정하의 농지개혁보다 높은 강도로 이루어졌다. 지 주에 대한 보상금액을 살펴보면 한국정부는 연간 수확량의 1.5배로 미군정 시기 농지개혁 에서 정한 연간 수확량 3배의 절반으로 정하였다. 실제로 농지대금의 상환과 보상은 매년 연간 수확량의 30%를 5년간 납부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한다면 5 년간 연간 수확량의 30%를 5년간 납부토록 하는 방식은 농민에게는 일종의 특혜라고 할 수 있다. 예시로 10%의 할인율을 적용하여 계산하면 5년간 30%씩 납부하는 금액은 실질 단위로 표시하면 1년간 생산량의 1.13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편, 지주는 농지개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우선, 지주는 보상금 지불지연에 따 른 인플레 폐해를 입었다. 1950~67년 지주의 명목 보상량은 1,176만석이었지만 이를 법 정 곡가로 계산하면 519만석으로 실제 보상량의 44.8%에 불과하였다. 이어서 지주에게 실제로 지불된 금액은 시장가격의 곡가가 아닌 법정 곡가로서 실질보상석수는 그만큼 감 소하였다. 보상 당시 시중시가로 환산하면 298만석으로 명목 보상량의 25.3%에 불과하였 다. 마지막으로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현금으로 보상받기 전에 이를 사전에 매각하였는데, 매각가액은 상환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평균 50% 이하의 가격으로 매각하였다.

그러므로 대다수 지주의 토지자본은 산업자본으로 축적되지 못한 채 대부분 소멸되었다

12) 농지개혁 및 농업생산과 관련하여 우대형(2001)과 조석곤(2013)은 의미 있는 실증분석을 시도하였다. 조석곤(2013)은 경지면 적 증가로 인한 농업생산 증가를 포함하여 농지생산성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박명호(2013b)와 맥락을 같이한다. 반면, 우대형 (2001)은 농지개혁과 농업생산을 소작률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농지면적에 따른 생산량 변화는 고려하지 않았다.

(권병탁[1984]).

결과적으로 지주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이 손실이 자동적으로 농민의 이익으로 귀 속되지는 않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정부는 군량미 조달을 위해 많은 양곡 을 필요로 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농민들에게는 현물로 상환토록 하였고, 지주에게는 법정 곡가로 지불함으로써 전비를 조달하였다. 특히 전시 중에 농민이 매년 수확량의

30%에 해당하는 미곡을 농지대금으로 상환하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13) 그러므로

전쟁과 더불어 지주와 소작인 모두 정부의 농지 분배를 원하지 않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지주는 자신의 농지를 직접 판매함으로써 농지채권을 피하고자 하였다. 소작인은 5년 동 안 매년 수확량의 30%를 곡물로 정부에 상환해야 하는데, 이는 시중에서 거래되는 농지 채권의 가치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셈이 되었다.

한편,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농촌인구의 4%에 해당하는 지주들이 주곡생산의 50% 또 는 농업소득의 25%에 해당하는 부분을 지대로 받았다(문팔용 외[1981]). 농지개혁 이후 일본인 지주들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한국인 지주는 그들이 소유했던 농지에서 농지자산 의 1/6~1/4 수준의 보상을 받았다. 농지 이외에 다른 소득이 없는 지주는 사실상 몰락했 고, 3정보 이상을 가진 자영농도 손해를 보았으나 이들은 전체 농촌인구의 4%에 불과했 다. 결국 농지개혁으로 혜택을 입은 1차적인 수익자는 농지를 분배받은 소작인이라 할 수 있다. 정부 또한 농지대금의 상환기간 동안 재분배된 농지에서 많은 수익을 얻었다. 문팔 용 외(1981, p.247)에 따르면 농지개혁으로 인한 소작인의 소득증대 규모에 대해 “농지개 혁 전과 농지개혁 후의 농업총생산이 같다고 하면, 상위에 있던 4%에 해당하는 농민의 평균소득 80% 감소는 1948년 이전에 소작농이었거나 자소작농이었던 하위 80% 농민의 평균소득 20~30% 증가와 맞먹는 것이었다”라고 추정하였다.

(3) 산업자본 형성

농지개혁의 주요 목적의 하나는 지주의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거나 지주를 자본가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을 통해 자본축적을 촉진하여 한국의 자본가계급 형성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과 관련하여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농지개혁의 주요 목적의 하나는 지주의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거나 지주를 자본가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을 통해 자본축적을 촉진하여 한국의 자본가계급 형성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과 관련하여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